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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화려한 휴가>의 '택시기사 인봉' 박철민

by 마음풍경 2007.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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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휴가>의 택시기사 인봉 역의 영화배우 박철민
ⓒ 오마이뉴스 김호중

왼쪽 눈 밑에 푸른빛의 흉터가 먼저 눈에 띄었다. 예전에 생긴 흉터인데 피곤하면 색깔이 더 짙어진다고 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택시기사 인봉. 지난 10일 서울 논현동 한 커피숍에서 만난 영화배우 박철민은 지금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려한 휴가> 개봉 이후 금ㆍ토ㆍ일요일은 무대인사를 다니고 주중에는 시나리오도 읽고 차기 작품을 촬영하면서 각종 언론들과의 인터뷰를 치러내고 있다. "이제까지 배우생활을 하면서 했던 인터뷰 횟수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날도 KBS <아침뉴스타임>에서 인터뷰 장면을 스케치했고, 저녁 상암CGV에서 무대인사가 예정돼 있었다.

인터뷰 전날인 9일 <화려한 휴가>는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는 "400만, 꿈의 숫자이기도 하지만 누구 말처럼 우리는 아직도 배고픕니다"라며 웃었다. 그리고 흥행 원인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덧붙였다.

"5월마다 나왔던 다큐멘터리·사진전·증언들, 이런 것들이 아닌 영화였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영화는 픽션을 가미할 수 있고 감정에 호소도 많이 하게 되죠. 그러면서 우리가 알았던 5ㆍ18과 달리 5ㆍ18의 민초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는 것들이 가슴에 전달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관객 6백만 넘으면 잘린 장면들 공개한답니다"

박철민은 <화려한 휴가> 시사회 무대인사 때 "촬영 때는 배역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찍혔다가 편집과정에서 하염없이 작아지는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해 기자들로부터 박수와 웃음을 이끌어냈다.

- 이번 <화려한 휴가> 때도 편집과정에서 많이 잘렸는지?
"실은 이번 영화가 제일 많이 잘렸어요. 워낙 영화에서 비중도 컸고, 또 정신없이 찍혔습니다(웃음). 감독님은 너무 재밌어서 너무 웃겨서 잘렸다고 하면서 몇 장면을 보여주시는데 정말 그 장면을 보니까 제가 너무 웃겨서…. 격정적으로 시민군과 계엄군이 싸우고 있는데 내가 너무 까불어버리니까 이건 좀 문제가 있구나 싶어 아쉽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흔쾌히 저도 인정했고…."

그는 인터뷰 틈틈이 익살맞게 <화려한 휴가>에 대한 홍보를 덧붙이곤 했다. 이 대목에서도 "감독님이 600만 넘으면 잘린 장면들을 공개한다고 약속했다"면서 "여러분이 조금만 더 도와주신다면 저의 정말 눈부신 장면들, 두세 배 더 웃기고 재밌는 장면들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인봉과 용대의 작은 역사'를 다룬 장면을 귀띔해줬다.

"아직 똥에 얽힌 서로의 악연을 모른 채 둘이서 M60을 들고 YMCA 옥상으로 올라가다가 너무 무거워서 쉬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먼저 그러죠. '이거 월남에서는 하나도 안 무거웠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졌는지 모르겠다', 실은 방위 출신이면서. (그럼 용대가) '정말 월남용사냐?' '아따 질문이 경솔하다. 들어나 봤나? 월남 백마부대' 이렇게 농담을 하다가 둘이 어디서 본 거 같거든요. '혹시 화성 출신 아녀?' '아닌디, 난 곡성인디' '혹시 어디 초등학교 나왔오?' '난 중졸인디' 하면서 두 사람의 역사가 소개되는 장면이 있어요.

광주 출신도 아니고, 초등학교ㆍ중학교밖에 안 나온, 정말 이 땅의 밑바닥 민초들이란 정보를 주면서 웃음까지 주는 장면이 있는데 실은 인봉과 용대의 작은 역사들이죠. 그래서 애정도 있고 둘이 말도 많이 맞추고 아이디어도 많이 만들어서 더 재밌게 했는데…. 결국 재밌어서 잘렸습니다(웃음)."

▲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 역 박철민과 용대 역 박원상은 빛나는 단짝 코믹연기를 펼친다.
ⓒ CJ엔터테인먼트
'양아치' 용대 역의 박원상은 그가 직접 김지훈 감독에게 추천했다. 애초 캐스팅됐던 배우가 사정상 참여할 수 없게 돼 감독이 새 배우를 물색하자 그는 "거침없이, 아무 생각 없이, 1초도 안 걸리고" 박원상을 추천했다. 박원상과는 연극 <변학도는 왜 향단이에게 삐삐를 쳤는가>에서 함께 연기한 적이 있었다.

"연극을 통해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매력적인 남자란 걸 알고 있었고 용대를 제일 잘 소화해낼 것이라고 믿었죠. 그리고 제 연기가 좀 공격적이에요. 더 까불대고 없는 애드립이 갑자기 나오기도 하고, 그것을 잘 추스르고 큰 품으로 받아줄 친구가 원상이었기 때문에 추천을 했죠. 추천하자마자 이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작품도 없었기 때문에 '형 무조건 할 거야' 달려들었고. 그래서 작품에선 끊임없이 갈등하지만 촬영장에서나 술자리에서는 안아주고 이끌어주고, 특히 제가 지도편달 해주고 하면서(웃음),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박원상과 단짝을 이뤄 완벽한 호흡으로 펼치는 코믹연기는 주연배우 못지않게 빛난다. 특히 인봉과 용대의 티격태격 익살과 재담은 자칫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드라마에 웃음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 어느 캐릭터보다 살아있고, 그만큼 관객의 호응도 크다.

"아마 인봉과 용대를 더 사랑해주신다면 그 이유는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좀 까불대고 튀는 연기도 했지만, 80년 5월 당시 그 5월을 이끌었던 주인공들이 바로 민초였기 때문에 양아치 용대, 택시기사 인봉의 시선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또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여 주시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맛깔스런 대사의 원천은 소설 <태백산맥>

"안주가 건방지다." "남의 영업용 택시에 똥칠을 해놓고선 택시비만 주는 것은 경솔하제. 야심한 시간에 연놈이 갈대밭에서 기어나올 때부터 감각적으로다 거부하고 싶었어." "분노를 발생시키는 새끼! 결국 폭력을 유발하게 허네이."

그는 <화려한 휴가>에서 맛깔스런 남도사투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인봉이란 캐릭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의 걸쭉한 사투리와 절묘한 비유에 크게 힘입고 있다.

이미 영화 <목포는 항구다("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쉭- 입은 가만 있잖여")>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내가 일단 칼을 빼면 칼이 흥분을 혀")>에서 '박철민표 대사'를 선보인 바 있다.

- '박철민표 대사'는 시나리오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현장에서 애드립으로 하는 것인지?
"작품을 받고 배역을 받으면 일단은 끊임없이 읽습니다. 읽다 보면 그 대사가 갖는 길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끊임없이 읽다 보면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형용사부터 바꾸기 시작해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서너 가지가 되죠. 그럼 감독님한테 보따리를 가지고 가고 감독님이 고르는 거죠. 내 대사의 60~70%는 수없이 읽으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대사이고, 20~30%는 정말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애드립이죠."

ⓒ 오마이뉴스 김호중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누가 그녀와 잤을까>의 김유성 감독은 한 영화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에 대해 "주어진 대본에 충실하는 건 물론이고 그 대본을 토대로 세 가지 네 가지 혹은 여덟 가지 이상의 준비를 해 오세요, 감독으로서는 다양한 무기를 장착해서 온 배우한테 어떻게 애정을 안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높이 평가했다.

- 대체 그처럼 맛깔스런 남도 사투리와 비유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지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아주 충격적으로 만난 책이 있습니다. <태백산맥>. 그전까지 책이나 도서관·강의실은 저하고 친숙하지 않았죠. 그런데 <태백산맥>을 어떤 계기로 첫장, 둘째장을 보게 됐어요. 그림만 안 그려져 있지 우리가 그렇게 재밌어하는 <공포의 외인구단>과 비슷하구나. 그런 충격을 느끼면서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 10권을 거침없이 통으로 다 읽고 나니까 남도사투리의 아름다움, 맛깔스런 질펀함이 계속 뇌리에 살아 있는 거예요. 은유·직유·의인·이런 화법들을 써서 정말 조정래 선생님이 보고처럼 만들었잖습니까.

두 번째 읽을 때는 대사 중심으로 끊임없이 뇌까리면서 읽어봤습니다. 세 번째는 지금도 유용한 거, 통할 수 있는 거, 통하든 안 통하든 남게 하고 전하고 싶은 것들을 노트했어요. 그 과정 속에서 똑같은 말이라도 맛있는 직유를 하면 더 찰져지고 엉뚱한 은유를 하면 전달이 배가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철 없던 시절 만난 '5월 광주'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그는 광주 출신이다. 80년 5월 당시 광주, 그 곳에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다.



- 정말 많이 받은 질문일 텐데요, 80년 5월 당시 광주에 있었기 때문에 <화려한 휴가>가 남달랐을 듯싶습니다.
"다른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 비해서 남 달랐겠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그렇지 않았다'고, '워낙 이 작품은 현대사의 큰 비극을 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도 광주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고 망월동 가고 책 읽고 사진전 보면서 많은 준비를 했고, 모든 배우들이 남다른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에 저하고 큰 차이가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어렸기 때문에 단편적이었던 기억"들을 들려줬다.

"학교 안 가서 신나는 거, 체육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방학이 돼버려서 원망스러운 광주, 아버님이 선생님이셨는데 학생들 지도 나갔다가 공무원 배지를 달고 계셨는데도 폭행을 당해 정말 못 알아볼 정도로 부어서 집에 오셨을 때의 공포·두려움, 그런 광주, 광주도청을 점령하고 '고향의 봄'을 부르시면서 얼싸안고 행복해서 해방춤을 췄던 모습들, 그 사이에 상무관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왔던 곡소리들, 시민군들이 '이놈의 자식' 하면서 건네줬던 써니텐·환타·카스테라…. 이런 것들이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그 흩어진 조각들은 대학에 들어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읽고 퍼즐처럼 맞춰졌다. "이게 그 때 그 처절했던 광주였구나, 이게 그 처절했던 도청의 분위기였구나, 그렇지만 또 장렬했던 광주였구나, 너무나 슬프고 아프지만 또 찬란했던 5월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자취방에서 펑펑 울기도 했죠."

광주항쟁 당시 부상을 당한 부친은 현재도 광주에서 살고 있다. <화려한 휴가>를 보고 부친은 그에게 두 마디를 얘기했다고 한다. "제대로 광주더만", 그리고 "니가 한참 영화 가운데 있더만". 부친의 호의적인 평가와는 달리 <화려한 휴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을 연기한 박철민은 지난 12일 국립5·18민주묘지 참배 후 묘역을 둘러보다 고등학교 선배인 고 김부열씨의 묘비에 쓰인 글귀를 읽으며 울먹였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먼저 광주항쟁의 원인 등에 대한 묘사나 해석 없이 학살과 전투 장면의 재현에만 그쳤다는 비판에 대해선?

"우리 작품은 다큐멘터리나 책이 아니라 영화입니다. 충분히 생략할 수 있고, 생략해도 전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일단 광주를 많이 경험한 30·40대는 그 이유가 필요가 없죠. 그 분들한테는 죽어 있는 광주를 되살아나게 하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10·20대에게는 광주가 어떤 것인지만 전달해도 큰 성과라고 생각했거든요. 10, 20대는 30, 40대보다 더 하염없이 웁니다. 또 (극장을) 나오면 슬픔이 끝나버린다고 지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10·20대는 바로 컴퓨터 앞으로 가서 '5ㆍ18' '광주'를 쳐봅니다."

그럼 '해방광주의 모습이 부족해 아쉬웠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부끄럽습니다. 실은 주먹밥을 나눠먹는 장면이라든가, 주유소나 은행들이 한 번도 안 털렸던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긴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금씩 자르다 보니까 그런 장면이 잘려나갔는데 저도 굉장히 안타까워했고 관계자들도 자기의 팔을 자르듯이 고통을 감수했어요. 그런 지적에 대해선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익살 연기가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평가에 대해선?

"무겁고 가슴 아프고 슬프고 눈물이 넘치는 영화지만, 80년 5월은 절대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슬픔 속에 아픔 속에 웃음이 있었고 농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죠. 그 부분들이 더 크게 전달됐을 때 광주는 화석이 아니라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광주인 거고, 기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광주인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더 까불대는 게 더 진짜 광주, 더 살아있는 광주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차원이지만 '전사모(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일부에선 <화려한 휴가>의 개봉 시기와 정치적 의도 등을 문제 삼아 '안 보기 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선?

"5ㆍ18 때 다른 생각을 가지셨던 사람들도 <화려한 휴가>를 보시면 다른 느낌들이 드실 겁니다. 누가 적이고 우리 편인지를 나눈 영화라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당했던 광주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춘천에서도 그런 상황이 되면 똑같이 나올 수 있는 비극이거든요. 혹시 가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보고서 '그 때 잘못했습니다' '아닙니다' 하고 반성하고 안아주는 화해의 장이 됐으면 좋겠는데, 이건 제 개인적인 작은 바람이구요…."

그 때 인봉은 왜 도청으로 돌아갔을까

그는 두 딸의 아버지다. 큰딸은 광주항쟁 당시 그의 나이와 같은 중학교 2학년생이다. 둘째딸은 아홉 살. 큰딸은 아버지가 펑펑 울며 보던 시나리오를 뺏어 읽고 역시 펑펑 울었다고 했다.

-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은 찾아온 아내를 따라 도청을 떠났다가 다시 도청으로 돌아가는데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많이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저였다면, 제가 인봉이었다면, 절대 돌아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밤새 번민하고 갈등했겠죠. 나갈까 말까, 우리 아기 한번 안아봤다가 다시 또 뉘였다가, 문턱까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가….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은 했겠지만 도청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도청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이거든요. 비겁하지만 그게 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인봉은 왜 돌아갔을까. 이게 저 화두였어요. 12번 NG 나면서 울음도 다시 안 나오고 감독님 질책도 있고, 다시 갑시다, 다시 갑시다 하면서 찍었었는데, 왜 인봉은 갔을까. 그리고 인봉의 아내는 왜 반대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면서 잡지 못했을까…."

▲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도청을 찾아온 아내가 인봉에게 집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간청하고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인터뷰 내내 농담을 섞어가며 유쾌하게, 그 자신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까불대던' 그였지만 어느새 눈물이 글썽였다. 목도 잠겼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그게 광주였던 거 같아요. 그게 정말 따뜻한 광주였고, 처절하고 비참했지만 아름다운 광주였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봉은 아마 그 10일 동안 뜨거운 공동체의 경험을 했을 거예요. 더불어 사는, 높은 사람 없고 아랫사람 없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서로 존중해주고 사랑해주는 뜨거운 우정, 동지애, 이런 것들을 정말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했을 텐데. 그 뜨거운 경험들을 뒤로 한 채 잘 수만은 없었던 게 인봉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신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비겁해지는 자신을 추스를 수 없어서 갔을 것 같은데…."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에 점점 격정이 더해졌다.

"인봉이나 용대는 죽으면서 아마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이게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가치인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가치인지, 인간을 존중하는 뜨거운 가치인지, 그렇게 개념적으로 단어로 느끼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몰랐던 거지, 따뜻한 인간의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높낮이 없는 행복감들을 다 느끼고 간 거죠. 그래서 인봉은 돌아갔고,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20여 년을 광주만 생각하면 아파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광주를 기억하기 싫어했을 수도 있고, 멀리했을 수도 있고…."

그는 가슴 한 켠에 묻어뒀던 어린 시절 '기억의 단편'을 다시 끄집어냈다.

"우리 작품에선 신애(이요원 분)가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잊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때 실은 '빨리 나와주세요'가 더 강하고 컸어요. '시민 여러분 빨리 나와주세요, 공수부대들이 턱 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오셔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빨리 나와주세요'가 신애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직접적이고 처절했어요. 70만 광주시민들이 새벽에 모두 다 그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숨죽여서 슬퍼하고 부끄러워했겠죠…."

헛헛한 웃음으로 감정을 추스른 뒤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 장면) 바로 뒤에는 나문희 선생님이 죽은 자의 영정을 안고 울잖습니까. 저는 산 자, 핏덩어리를 안고 울잖습니까. 죽은 자를 안고, 산 자를 안고 울었던, 그게 당시 광주였거든요."

날라리 386 운동권?

그는 '산 자'에 속했다. 그리고 5년 뒤 광주를 떠났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중앙대 경영학과 85학번. 마당극 동아리를 만들고 연극을 통해 '광주 학살'을 자행했던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또 사회대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다. 이른바 전형적인 386세대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내기까지 했는데 열성 운동권 학생이었나요?
"인터뷰하면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아주 어색합니다. 그 시대 돌 한번 안 던져본 대학생들 없고, '님을 위한 행진곡' 한번 안 불러본 친구들 없죠. 저도 그런 축이는데 날라리 운동권이라는 표현이 제게는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연기활동을 하다 보니까 학생들이 많이 알아봐서 등떠밀려 학생회장에 나간 거죠. 그 때 대부분 연설을 아주 경직되게 하는데 저는 까불대면서 하니까 '저 친구 학생회장 하면 재밌겠다' 해서 찍어주고. 학생회장이 되고서도 우리 주장을 당당히 외치는 자리인데 즐겁고 신나게 할 수는 없을까 싶어 개사곡과 노래율동도 재밌게 해보고 말투도 재밌게 빗대보기도 해서 재밌는 학생회장, 신나는 학생회장으로 인기도 좀 올라가고, 그게 전부입니다."

- 386세대이고 전대협 세대인데 혹시 386 정치인 가운데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나요?
"같이 활동했던 몇 사람 있죠. 그 친구들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잘 못하듯이 그 친구들도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 치열하고 절절하게 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을 하든 당당히 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에 견줘보면 저는 날라리 운동권이죠. 정치권에 들어갔던 친구들도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으로만 보면 날라리 운동권이 많죠(웃음)."

ⓒ 오마이뉴스 김호중
1988년 대학 4학년 때 노동자연극을 주로 했던 '극단 현장'에 입단했다. <노동의 새벽> <껍데기를 벗고서> <이바구세상> 등 작품으로 90년대 초반까지 극장무대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을 찾아다녔다. 구사대에게 끌려가다가 조합원들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고, 자동차 트렁크 안에 숨어서 소품을 날랐던 적도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과 투쟁을 그린 작품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87년 이후 90년대 초까지 노동운동이 아주 왕성했던 시기였고, 또 노동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의 연극을 만들었을 때 이게 또 상업적으로도 괜찮아요(웃음). 노동자들이 극장에 와서 보는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희가 많이 찾아갔죠."

당시 때때로 문화공연 집회 사회를 보면서 관중과 주고받는 재담으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 때 '민주대머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집회 참여자들의 호응이 커질수록 그의 고민은 깊어졌다.

"제 스타일이 흐트러진 사회를 봅니다. 까불대고 격식을 갖추지 않고. 그런 흐트러진 사회가 신선해서인지 많이 찾고 해서 사회를 한참 많이 봤죠. 그러나 사회를 볼 때도 왜 내가 여기 있지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분명히 사회현상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저는 무대 위에서 하고 싶었고 연기를 통해서 하고 싶었거든요."

배불렀던(?) 대학로 배우 시절

그래서 "배우로서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기 위해, 좀 더 다양한 작업을 하기 위해" '제도권' 작품들을 만나며 연기의 폭을 넓혀 갔다. 지금까지 출연한 연극 작품은 50여편. 그 가운데 양심적인 한 소시민의 국회의원 도전기를 그린 <대한민국 김철식>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그 밖에 명계남과 함께 출연했던 <늘근도둑이야기>, 그리고 <비언소> <오봉산 불지르다> <주머니 속의 돌> 등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당시를 그는 "너무도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시절"로 기억했다.

"남들은 배고프지 않았냐고 물어보는데 '우리 밥 매끼 먹었다, 절대 배고프지 않았고 오히려 그때는 언제 먹을지 모르니까 많이 먹는다, 그래서 늘 배고팠던 기억보다는 배불렀던 기억이 많다'는 얘기를 하는데, 저는 '배불렀던 시절'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배도 배불렀지만 마음이 굉장히 배불렀고 여유 있었고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다만 소주에 삼겹살, 맥주에 치킨을 마음껏 먹지 못한 건 좀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 때 꿈이 그랬어요. 삼겹살을 마음대로 먹으면서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 너무 (술을) 많이 먹어서 지금은 (삼겹살과 치킨을) 많이 먹을 수 있는 환경인데도 소주는 한 병, 맥주는 서너 컵밖에 못 먹어요. 이게 인생인 것 같아요."

- 그럼 요즘 대학로 후배들한테 삼겹살은 자주 사주는지?
"<품바>라는 공연을 했는데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품바가 관객에게 던지는 대사죠.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라. 업신여기지 마라. 우리는 베푸는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저는 그 대사를 당시에 가장 좋아했어요. 좋아했지만 몸으로는 못 느꼈죠. 요즘 후배들하고 술자리를 할 때 제가 지갑을 열잖아요. 그때 신나고 기뻐요."

물론 잦은 촬영 일정 때문에 대학로 후배들의 전화에 달려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가 무명 시절 떴던 형들이 또 그랬거든요. 우리는 그 형들을 노가리 대신에 씹으면서 정말 깡소주를 먹었거든요. 아마 많은 후배들이 지금 저를 씹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안하죠."

<화려한 휴가>의 '수석조연'

광주와 그는 뗄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그의 스크린 데뷔작인 <부활의 노래>(1990년)도 역시 5월 광주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는 '시민군K'로 출연했다. 이후 <불꽃> <화려한 휴가>, 그리고 차기작인 <스카우트>도 직간접으로 5월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우연의 일치인 것 같다"고 했다.

"저는 작품을 가리지 않습니다. 조연배우들의 생리인데요. 작품이 잘 안 들어오니까(웃음) 일단 들어오면 긍정적인 생각을 해요. 어떻게든 이 작품 놓치지 않아야겠다, 개런티 맞춰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목포는 항구다>에서 '가오리' 역을 연기한 박철민. "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녀, 쉭- 입은 가만 있잖여"라는 대사와 코믹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 기획시대

그렇듯 가리지 않고 단역 또는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이미 30여 편이 넘는다. 그 가운데 특히 <목포는 항구다(<화려한 휴가>와 같은 김지훈 감독의 작품ㆍ가오리 역)>는 "영화배우 박철민의 이름을 새롭게 새긴 작품"으로, 또 <혈의 누(조달영 역)>는 "이제까지 한 번도 안 해봤던 악역으로 매력을 느꼈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출연했다. KBS-TV의 <불멸의 이순신>에서 '날라리 장군' 김완 역으로 2005년 KBS 연기대상 남자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선배님들이 그래요. 드라마 몇 편 안 하고 막 시작한 친구가 조연상 받기는 쉽지 않다, 무슨 배경이 있느냐(웃음). 정말 빛나는 조연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을 다 모아서, 제가 워낙 까불대가지고 튀니까, 이 친구를 주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래서 준 것 같습니다."

- <화려한 휴가> 기자간담회 때 자신을 '수석조연'이라고 소개했는데 주연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조연이 좋아요. 일단 부담이 없습니다. 작품을 책임지기보다는 어떤 작은 역할들을 야무지고 당당하게 해서 주연을 빛나게 해주고, 작품을 빛나게 해주고, 그런 부분들이 저는 매력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수많은 조연들을 더 많이 해보고 싶은 게 제 솔직한 바람이고. 그래도 또 감독들이, 대중들이, 나를 주연의 자리로 불러낸다면 또 신나게 가서 할 거 같아요, 하하하, 이거 속 좀 보이나, 하하하."

"저는 이미 꿈을 이뤘어요"

그는 요즘 틈틈이 산을 오르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 촬영 기간 동안 "부안의 아름다운 안주들, 다양한 술들에 심취하다 보니까 건강이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은 도저히 못 끊고, 대신 담배를 끊고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산길을 걸으며 '욕심부리지 말자' '질투하지 말자'는 자신의 좌우명을 계속 되새기고 있다.

- 그래도 욕심을 부린다면 배우 박철민의 꿈은 무엇인지?
"저는 꿈을 많이 이뤘어요. 배우의 꿈은 대중을 많이 만나는 거거든요. 대중을 많이 만나서 사랑을 듬뿍 받는 거거든요. 박수 많이 받는 거거든요. 무대 위에서 정말 박수 많이 받았고, 이번에 정말 훌륭한 큰 작품 만나서 벌써 400만 넘어가고 500만 가는데. 이미 꿈을 이뤘으니까 계속 이 꿈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미처 못다한 얘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산다면 열심히 살았고, 또 까불면서 정신없이 살았고, 게으름 많이 피우면서 엄하게 살았습니다. 매순간이 다 아름다웠지만 <화려한 휴가>를 찍으면서, 인봉을 만나면서, 용대를 만나면서, 가슴 아프게 죽어간 민우ㆍ진우를 만나면서 다시 한번 저를 생각하게 됐고 살아있다는 것의 소중함도 느끼게 됐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화려한 휴가>를 보시면서 살아있다는 소중함, 죽은 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관심, 뜨거운 관심을 느껴보시는 게 어떨까요."

 

valign=top "죽으러 가는 남편 잡지 못했던..그게 광주였다" / 김호중 기자

 

2007-08-14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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