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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사찰

윤선도 무덤 가는 길 - 고산의 은거지 금쇄동을 찾아서

by 마음풍경 2010. 11. 17.

고산 윤선도 무덤 길

 

 

전남 해남  현산면 구시리 원천동(금쇄동)

 

 

금쇄동 입구 안내판 ~ 고산 신도비 ~ 윤선도 무덤 ~ 

금쇄동 임도 끝지점 ~ 고산 제각 ~ 입구 안내판

(약 7km, 2시간 소요)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의 흔적들이

이곳 저곳에 많습니다.

그중 금쇄동은 고산 윤선도가 경북 영덕에서

해배가 된 후 수정동 및 문소동에 이어

고산이 찾은 3번째 은거지로 고산이 쓴

산중신곡과 금쇄동기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금쇄동은 대흥사에서 해남 읍내 방향으로 가다

매정 3거리에서 왼편으로 806번 지방도를 타고 약 4km 가면

도로 입구에 윤선도 유적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도로 입구에서 다시 시골 길을 따라

약 3.5km를 들어오면 금쇄동 안내도가 있는

주차장을 만납니다.

 

안내도에는 금쇄동기에 나오는 22개 지명를 찾아가는 

그림과 설명이 있는데 제1 탐방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안내도 왼편에 있는

산 방향으로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하여 최근 세운것 같은 이정표가 있는

고산 윤선도의 묘소 방향인

제2 탐방로를 따라 걷기를 시작합니다.

 

고산이 금쇄동에 터를 잡게 된 연유는,

경진년 54세가 되던 어느날 금쇄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나서 이곳에

회심당과 불원요, 휘수정, 양몽와, 교의제 등

건물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들어가는 길이

참 깊고 한적한 느낌이 가득하네요.

 

왼편 산에 있는 산성을 따라가면

금쇄동인것 같은데 길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네요.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지은

‘초득금쇄동’ 이란 작품에서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 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공으로 내게 석궤를 주시는고’ 라는 내용을 보면

금쇄동을 얻은 기쁨이 얼마 했던가를

 짐작할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금쇄동기에서 ‘금쇄동의 계곡입구에

도달하면 점로는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산세가 험하고 급해서 그 아래로 왕래하면

단지 단애와 취벽만 보이고

높이 솟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 같고,

저녁놀이 서린 첩첩한 산봉우리 같아서

골짜기가 거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금쇄동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 1.5km를 오니 신도비로 가는

삼거리 이정표가 나옵니다.

오늘 걷기는 왼편길로 올라가서

오른편 길로 내려오는 코스가 될것 같네요.

 

임도길을 버리고 숲길을 따라

들어가니 고산 신도비를 만납니다.

신도비는 고산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679년 미수 허목이 비문을 짓고

1718년 4대손 윤덕희가 세웠으며 높이는 3.5m라고 합니다.

세월이 오래되어서인지 비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기는 힘들더군요.

 

그리고 산길을 따라 풀을 헤치고 가니

윤선도의 무덤이 나옵니다.

당초 이 무덤 터는 윤선도와 인척관계였던

당시 유명한 지관인 이의신이 잡아놓은 터였는데

고산이 이곳에 자신의 무덤터를 잡게 된 사연이 있더군요. ㅎㅎ

 

이의신은 묘 자리로 쓰기위해

말을 타고 매일 금쇄동을 찾았었는데

어느날 이의신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 고산이 말을 타고 가니

그 말이 습관적으로 자신이 늘 상 다니던 곳으로 가니

그 자리의 지세를 보니 천하 명당자리인지라

고산은 자신의 묘자리로 삼기로 하고

말뚝을 박고 묘자리를 표시 한 후

이의신에게 자신이 보아둔 묘자리가 있다며 이의신을 데려가니

이의신이 웃으면서 '자리에는 임자가 모두 따로 있는데

자신이 괜스레 헛고생을 했다'며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차 한잔을 하는데 사람 살기 좋은 곳이

죽은 후에 머물기도 좋은 곳인가 봅니다.

주변 풍광이 그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입니다.

 

 고산 무덤을 빠져나와 다시 임도길로 접어듭니다.

 

삼거리 입구에 금쇄동 이정표가 있어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오른편 임도 길을 따라 가봅니다.

입구 안내판 방향에서는 갈수 없어도 이곳으로는 갈수가 있나보네요.

 

임도길 건너편 저수지 풍경도 그저 편안합니다.

 

금쇄동으로 이어지는 길 또한 참 걷기에 좋은 길이고요.

 

따뜻한 남쪽 나라여서인지 11월 중순인데도

여러 꽃들이 활짝 피어있습니다.

 

다만 약 1km 정도 이어지던 임도 길은 끊어지고

풀과 잡목이 우거져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되돌아 나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조금은 아쉽더군요. 쩝

 

당초 금쇄동이라는 이정표만

없었서도 덜 서운할텐데

그래도 참 편하고 좋은 길이 이어지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네요.

 

 내려오는 길에 고산 제각을 만났습니다.

 

허물어진 건물을 최근에 다시 복구를 했다고 하네요.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건물 주변 느낌이 참 좋습니다.

 

 고산제각을 나오니 처음 지났던 삼거리를 만났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돌았네요. ㅎ

 

꽃피는 봄에 와서 걸어도 참 좋은 길일것 같습니다.

 

길너머로 두륜산 능선도 조망이 되고요.  

 

 다시 주차장이 있는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천천히 걸어서 약 2시간이 소요되었네요.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서 세 차례에 걸쳐 약 9년간 은거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잘알고 있는 '오우가'를 포함하여

'산중신곡'19수, '속 산중신곡'2수, 기타 5수 모두 26수의 시가(詩歌)와

 '금쇄동기'라는 한문수필을 지었다고합니다.

'어부사시사'4편을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은 것과 비교할 때

금쇄동은 보길도 부용동에 견줄 수 있는

 고산 문학적 산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부용동과는  다르게 이곳 금쇄동에서는 무덤 등을 빼고는

고산의 관련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이 크네요.

차후에라도 무조건적인 개발이나 복구는 문제일  수 있지만

과거 역사 문학의 흔적들을 복구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된다면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이야기들이 살아 생상하게 느껴지는

역사와 문학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멋진 스토리텔링 옛길이 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