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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길 이야기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18)] 거위가 노는 카이스트 길

by 마음풍경 2012. 1. 24.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18번째

[거위가 노는 카이스트 길]

 

신성동 ~ KAIST 기숙사 길 ~ 카이스트 어은동산 ~ 거위 건널목 ~ 운동장 후문 ~

성두산 근린공원 ~ 탄동천 ~ 신성동(약 8km, 2시간 소요)

 

 

설 연휴 마지막 날에 18번째 동네 올레길로 "카이스트 길"을 걷기위해 길을 나서봅니다.

설 전에는 봄날처럼 날이 포근했는데 설 연휴 기간에는 날이 상당히 차갑습니다.

 

하긴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겠지요.

얼굴로 느껴지는 싸한 느낌도 참 좋습니다.

 

가던 길에 동네 카페인 '에떼'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 사기 위해 들어갑니다.

다행히 연휴 마지막 날인데 오픈을 했더군요.

 

과거에는 참 작고 조그만 카페였는데 이제 대전에 여러 체인점도 있는 아주 성공한 카페가 되었지요.

 

제 생각으로는 성공의 이유가 여느 전문 카페점보다 가격이 무척 저렴하며

재료도 좋고 맛의 품질 또한 좋아서 인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작은 불만은 카페 라떼의 양이 쬐끔 더 많았으면 하네요. ㅋ

 

평소 같으면 차들로 제법 붐비는 거리를

오늘은 한적하게 걸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평소 늘 산책삼아 다니던 항공우주연구원 앞을 지나 카이스트로 들어섭니다.

 

이곳을 자주 와도 이 비석을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오늘은 걷는 길의 주제를 카이스트 길로 했기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하얀 비행기라는 시가 새져겨 있더군요.

 

하여 여느 시비와는 그 모습이 왠지 달라서

시비의 뒷면을 보니 이 추모 시비를 세운 내력이 나와있습니다.

2003년에 실험 중 폭발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박사과정 학생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시비였네요.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그 소망을 채 피우지 못한 체 저세상으로 간

친구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긴 제가 이곳 대전이 아닌 서울 홍릉에서 카이스트를 다닐 때도

매년 사고로 학생이 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그런 죽음이 KAIST의 징크스처럼 여기기도 했고요.

또한 작년에 이곳에서 많은 자살 사건이 발생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죽고나면 모든게 다 찰나일텐데 그래도 사는 것이 참 질기고 때론 모질기도 합니다.

 

추모비를 지나 어은 동산으로 가봅니다.

 

어은 동산은 카이스트 내에 있는 유일한 작은 동산입니다.

능선을 따라 아주 작은 산책로가 있고요.

 

산책로 중간 쯤에 취수탑이 우뚝합니다.

멀리서 보면 카이스트의 상징탑 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취수탑 옆으로 원두막도 설치가 되어 있습니다.

꽃피고 날 좋은 날 이곳에서 차 한잔 마시면 참 편안할것 같네요.

 

비록 산책로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서 아쉬움은 있지만

카이스트 교정내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사색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합니다.

 

90년 초반 캠퍼스 건립 초기만 해도 제법 여유가 있는 분위기 였는데

이제는 학교내에 너무나 많은 건물이 생겨서 조용하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이곳 말고는 거의 없지요.

 

물론 제가 다녔던 서울 홍릉 교정만 해도 그리 너른 공간은 아니었지만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주변에 나무로 우거진 연구소들이 있었으며

또한 산에 자리해서인지 답답함은 그리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산 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조용하지만 다른 계절에 이곳에 오면 

이곳 주변 나무에 서식하는 새들로 무척이나 시끄럽고

특히 여름에는 새의 냄새도 심하지요.

겨울에는 추워서 따뜻한 남쪽 나라로 잠시 이사를 간 모양입니다.ㅎㅎ

 

그래도 학교내에서 이만한 조망이 펼쳐지는 곳이 없지요.

흔들 의자에 앉아 따스한 햇살도 잠시 맞아봅니다.

 

전망대를 내려서서 어은동산 길을 빠져나갑니다.

밤에 이곳에 오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양이들을 많이 보는데

오늘은 낮이고 추워서인지 고양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동산 길을 내려와 호수 근처로 가니 꽉꽉~ 소리를 내며 무리지어 걷는 거위들을 만났습니다.

 

작년엔가 KBS 프로그램인 '스펀지'에 출연도 한 제법 알려진(?) 거위들이지요.

 

이 거위들이 TV에 출연한 이유가 바로 이 횡단보도입니다.

그 당시 KBS 스펀지에 나왔던 문제가 우리나라에는 거위가 건너는 횡단보도가 있는가? 없는가? 였던것 같네요.

 

 이곳 횡단보도에는 거위 모습이 그려진 횡단보도 표시판이 있습니다.

물론 거위들이 횡단보도를 알고 건너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이곳으로 길을 건너는 습관이 있어서

혹 차 사고라도 날까봐 습관처럼 건너는 이곳 길에 거위를 위한 횡단 보도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지금은 카이스트 하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학교 명칭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카이스트 보다는 한국과학기술원이라는 긴 이름이 쓰였지요.

(KAIST : Korean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원래 KAIST의 본래 이름은 KAIS 즉 한국과학원이었습니다.

1981년에 5공 정부가 기관 통폐합을 하면서 서울 홍릉 교정 옆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와 통합을 하는 바람에 KAIS와 KIST를 합쳐서 KAIST가 되었고요.

 

그이후에 정부 출연 연구소인 KIST와 이공계 연구중심의 특수 대학원인 KAIST로 다시 분리가 되었고

KAIST는 다시 학부 과정인 KIT(한국과학기술대학교)를 통합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카이스트 이름의 변천를 통해 우리나라 과학 정책의 난맥상을 보게되는 것은 아닌지 때론 씁쓸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된것도 가장 생산적인 가치를 만들어낸 공학도의 힘이 컸는데

요즘은 그만한 대접을 받지도 못하는것 같고요.

 

제가 카이스트 다닐 때는 매주마다 다양한 분야의 유명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습니다.

물론 일정 기간 참석을 해야 과목 이수가 되었고요.

문득 이 플랭카드를 보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ㅎㅎ

 

카이스트 교정을 걷고 운동장 옆 후문을 통해 카이스트를 빠져나갑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조금 더 걷고 싶어서 길 건너편에 있는 성두산으로 갑니다.

이곳은 대덕 사이언스 길의 2코스이기도 하지요.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754)

 

이 길은 작년 초여름 비오는 날에 걸어본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전에도 자주 찾아온 길이고요.

 

이번 연휴 기간 동안 읽은 책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 이곳에 옮겨봅니다.

 

"어느 날 문득 '난행고행은 모두 허망한 짓'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렸던 거지요.

그때부터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해도 된다. 좋아하는 일은 자꾸자꾸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키 간테이의 불량하게 나이 드는 법 중에서>

 

이 글을 읽고나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 있는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자연스러움을 통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동조를 하게 되더군요.

같은 예로, 죽기 살기로 백두대간 종주를 하든 또는 죽을 힘을 다해 지리산 종주를 하든지

그것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되기 보다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 하나 하나를 즐기는 여유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자아, 집착, 욕심 등등 인간의 마음속에는 늘 그런 것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과 충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녹초가 되도록 지쳐버리지요.

마음을 비우는 일은 자아를 죽이고 집착을 버리고 욕심에서 멀어지려는 행위입니다."

 

                                                 <세키 간테이의 불량하게 나이 드는 법 중에서>

 

책의 내용중에서 제 마음을 움직이는 글귀 몇자 더 옮깁니다.

이 글을 읽으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막상 실천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ㅎㅎ

요즘은 비우기에 앞서 포기를 먼저 배우게 됩니다.

포기를 하면 결국은 비워지는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때론 소망도 희망도 일단 다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네요.

 

 소망이 없으면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아픈 이별도 없는 것 처럼

어쩌면 이제는 없는 것이 더 나은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희망이나 기쁨이 내 인생에 없어도

세상은 다 그렇게 공허한거야 하면서

허허 웃으면 살아가는 체념이 편해지니 말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성두산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탄동천변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대덕 사이언스 길과는 안녕을 하고 왼편 천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합니다.

 

해마다 봄이면 화사한 벚꽃과 노란 개나리가 반겨주는 아름다운 천변 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4대강 공사의 여파로 인해 불쌍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천변 풍경만 남아 있습니다.

올해 여름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국민 세금으로 만든 저 공사의 흔적들은 

흉칙한 모습만 남기고 사라지고 없을텐데 말입니다.

 

천의 풍경은 조금은 덜 정리된 모습이라해도 이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런 느낌이어야 하는데요.

마치 자연 미인을 억지로 돈을 들여 성형 부작용만 가득한 인공 미인을 만든 것 같습니다.

비록 일부 구간이긴 하지만 4대강의 폐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이곳에는 새가 날고 자연 생태계가 살아 있지만

조금전 그곳은 새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고 개미 한마리 움직임이 없는 죽어버린 삭막한 땅이 된것 같습니다.

 

내 자신 속의 좁은 세상도 참 어지럽고 어수선한데

내가 사는 이 너른 세상도 참 심난하고 답답하기만 하네요.

그래도 작년 이길에 노란 단풍잎이 길 가득 쌓여 있었던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역시 자연만이 희망입니다.

 

지나는 길에 재미난 글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아마도 학생들의 과학 실험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들이 진정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서로를 아끼는 몸짓이겠지요.

저도 올 봄에 이 길을 걸으때마다 주변 나무에 비해 이 나무가 가장 늦게 싹을 띄우는지 관찰해야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면 죽을 때까지 아마추어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죽을 때까지 아마추어 기분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속의 집착도 욕심도 생기지 않고 다 버려질 수 있겠지요.

물론 프로가 될만큼은 저의 능력이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ㅋ

 

오늘은 2시간 남짓 즉흥적으로 가볍게 걸어본 18번째 동네 올레길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