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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변,해안

계룡산 남매탑 길 - 봄 안개속에 잠시 머물다.

by 마음풍경 2012. 3. 18.

 

계룡산 남매탑 길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입구 주차장 ~ 무풍교 ~ 천장골 ~

큰배재 ~ 남매탑 ~ 동학사 ~ 동학사 입구 주차장

(약 7.5km, 3시간 소요)

 

지난 2월초에 소복히 내린 눈을 밟으며 계룡산 지석골을 걸었는데 

오늘은 다시 천장골을 따라 계룡산을 찾아갑니다.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843)

 

당초 다른 곳으로 가려했으나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비가오고 

날도 계속 흐려서 가까운 곳으로 발걸음을 하네요.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장군봉 건너편의 치개봉(664m) 능선이

구름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습니다.

 

치개봉과 마주보고 있는 장군봉(503m)은 높이가 100여 미터 낮아서 인지

흐린 하늘이지만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요.

 

무풍교 앞에서 천장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오르는데

주변 풍경은 여전히 신비로움이 가득합니다.

잘하면 계룡산 주능선에서 멋진 운해를 볼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도 지니게 되네요. ㅎ

 

오늘이 토요일인데도 오전까지 비가와서인지

주말이면 언제나 등산객으로 붐비는 천장골이 무척이나 한가합니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자연의 모습은 잔잔한 수묵화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자꾸만 산길이 황폐화가 되어가는 느낌이네요.

땅위로 들어난 나무 뿌리를 보니 문득 정약용 유배길 중 다산초당을 올라가면서 만난 '뿌리길'이 생각이 납니다.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521)

 

지난 가을에 화려하게 피었다 이제는 봄비에 젖어 있는 나뭇잎을 보면서 계절의 흐름을 새삼 느껴보네요.

 

한적한 산 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올라서니 안개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때론 사진도 컬러 보다는 흑백이 좋고

영화도 과거의 흑백 영화가 더욱 정감이 갈 때가 있지요.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에 휴식을 주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이처럼 담백하고 단순한 자연과의 교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담백한 발걸음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큰배재를 지납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사람들의 소리와 암자의 목탁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남매탑에 도착하네요.

 

남매탑은 청량사지 쌍탑으로도 불리는데

5층탑이 보물 1284호이며 7층 높이의 탑이 보물 1285호입니다.

과거에 계룡산을 찾을 때면 자주 왔던 곳인데 이처럼 안개속에서 보긴 처음인것 같네요.

 

계룡산 남매탑은 수도승이라는 현실적인 환경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지못하고

남매의 연으로 남아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난 후 그 사리를 모신 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지요.

 

  안개속 희미한 모습으로 서있는 남매탑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커미 한잔 하는데 문득 지난번 거제 내도를 가면서 버스에서 읽었던 시 한구절이 떠오릅니다.

 

"변하지 않는 시야에 서 있는 귀향의 끝,

평범하게 말없이 살자고 약속했던 그대여,

끝없는 추락까지 그리워하며 잠들던 그대여,

나도 안다, 우리는 아직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

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마중기의 북해의 억새 중에서>

 

 

 당초 이곳에 올때는 삼불봉과 관음봉을 거쳐 은선폭포로 가려했으나

안개가 진하게 끼여서 조망도 전혀 없기에 그냥 동학사 방향으로 짧게 내려섭니다.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힐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이영유, 나는 나를 묻는다>

 

 

계곡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니 금방이라도 봄이 올것 같네요.

 

사랑의 뒷 모습에 이별이 숨어 있듯이

겨울의 끝자락에도 봄이 숨어서 살금 살금 오다가 그 겨울을 데리고 가겠지요.

 

남매탑 산길을 다 내려와서 잠시 동학사 경내쪽으로 발걸음을 합니다.

 

동학사도 원래는 신라때 지은 천년 고찰이나

6.25때 소실 된 후 개축해서인지 고찰의 느낌은 없습니다.

 

그래도 주변의 남매탑외에 그다지 내세울 보물은 없지만 갑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운이 쎄다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지요.

 

하여 동학사의 진면목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사를 깊게 감싸고 있는 계룡산의 신비롭기만한 조망이 아닐까합니다.

 

대웅전 창살의 꽃 색감이 참 곱고 모양이 무척이나 아름답네요.

 

오늘은 주변 풍경이 흐리고 회색이어서인지 더욱 꽃의 색감이 진하게 느껴지고요.

 

동학사 경내를 빠져나와 주차장 방향으로 걷는데

아직 계곡 깊숙한 곳에는 잔설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쩌면 저 잔설이 전부 녹아야만 진정한 봄이 오는 것이겠지요. 

 

동학사 계곡 물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주변 의자에 앉아 최근에 흥미있게 읽은 천명관 작가가 쓴

"나의 삼촌 브루스 리"라는 소설에 나온 글을 떠올려 봅니다.

 

"현대인의 삶에는 어느 정도 비극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직장인의 피곤한 얼굴에서,

술집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격앙된 어조로 떠드는 중년사내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여학생의 발걸음에서 슬픔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이상 구원을 꿈꾸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무너졌고 성공은 아득해 보이기만 합니다.

생활은 점점 더 편리해지는데도 사람들은 왜 더 외로워지는 걸까요?

그래서인지 세상엔 인생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강조하는 책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구원의 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말입니다.

 

 

 이소룡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요.

 

저도 주말마다 길을 걷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이나 목적은 아닙니다.

길을 걷는 그 자체가 그냥 좋아서, 몸과 마음이 그리하라고 하기에 기꺼이 하고 있을 뿐이고요.

그래서인지 늘 외롭게 걷는 쓸쓸함이 깃든 시간이지만 그래도 잔잔한 행복이 느껴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