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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길 이야기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26)] 서포 김만중 선생 문학비를 찾아

by 마음풍경 2013. 3. 24.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26번째

[서포 김만중 선생 문학비를 찾아]

 

 

신성동 ~ 도룡동 ~ 화봉산 ~ 한의학 연구원 앞 ~ 김반/김익겸의 묘 ~  서포 문학비

화암4거리 ~  양사싯골 ~ 기계연구원 앞 ~ 신성동

(약  14km, 4시간 소요)

 

구운몽과 사씨 남정기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 선생의 문학비와 함께

아버지인 김익겸과 할아버지인 김반의 묘를 찾아서 걷는

역사의 의미가 있는 동네 올레길입니다.

 

 

오늘 걷는 동네 올레 길이 벌써 26번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모르고 있었던 곳을 찾아가려합니다.

우리에게 구운몽과 서씨 남정기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와 함께

서포 김만중 선생의 문학비가 제가 사는 곳과 가까운 전민동에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되었습니다.

하여 화봉산을 넘어서 서포 문학비를 찾아가려고 집을 나섭니다.

 

아직 봄꽃들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집을 나서자 마자 자태 고운 매화꽃을 만나게 되네요.

 

집을 나서 탄통천을 지나는데 평소 보이던 오리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더군요.

아직 늦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마실 나갔는지 괜히 궁금해집니다.

큰 의미가 있는 인연은 아니지만 자주 보다보니 저절로 안부를 묻는 관계가 되나봅니다.

 

봄이 오면 동네에서 가장 설레며 찾게 되는 곳이 이곳 화학연구원 담장에 피는 영춘화지요.

노란 얼굴로 맨먼저 봄이 왔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꽃입니다.

그러다보니 꽃샘 추위에 떨며 봄눈을 맞는 풍경을 만나기도 하네요.

 

벌써 초봄도 많이 지나가는지 가지에 달린 꽃보다 땅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이 더 많습니다.

 

모든 사물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기에

이 세상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잠시 동네 길을 걸었을뿐인데 참 고맙고 소중한 모습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춘화 담장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이번에는 개나리 꽃을 만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춘화와 개나리 꽃을 같은 꽃으로 생각하는데 앞선 사진과 비교해 보니

꽃잎 수나 꽃잎 모양 등에 있어서 그 차이점을 바로 알수가 있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개나리보다는 영춘화 꽃을 더욱 좋아합니다. ㅎ

 

노란 봄꽃에 내 마음이 빠져서 걷다보니 마치 제가 매일 출근하며 걷던 길이 아닌

한번도 가보지 않은 전혀 다른 세상의 길을 걷는 기분이 드네요.

 

길가에 목련꽃도 꽃망울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고

봄이 성큼 성큼 다가오는 기운이 가득 느껴집니다.

 

연구단지 동네길을 걸어서 도룡동을 지나 화봉산과 우성이산 산길로 접어듭니다.

지난 12월 설국 풍경이 가득한 화봉산 능선길을 걷고 봄이 되서야 다시 찾았네요.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953)

 

날이 풀려서인지 능선 조망이 조금은 뿌옇게 보입니다.

 

가던 길에 불어오는 봄바람도 맞으며 커피도 한잔하고

편안한 능선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화봉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대덕 사이언스 길을 따라 능선을 이어걷다가

전민동에 있는 서포 문학비를 찾아가기 위해 한진종합 연구원 방향으로 내려섭니다.

 

개인적으로 이 길은 지금까지 한번도 걷지 않은 길인데 능선길도 참 여유롭고 

주변 조망도 시원하게 다가오는 참 좋은 길이네요. 

 

 산길을 빠져나가 엑스포 아파트 방향으로 차가 다니는 길을 이어 걷습니다.

 

 500여 미터 가자 한의학 연구소 정문 길 건너편으로

김반 김익겸의 묘라는 안내판을 만납니다.

 

 왼편 방향으로 마을 길을 조금 더 가니 산방향으로 묘가 나타나더군요.

 

 대덕연구단지에서만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곳에 이런 문화재가 있는지 전혀 몰랐었네요. 

이곳에는 오늘 찾아보려는 김익겸의 묘가 있는 광산 김씨의 선산인것 같습니다.

 

 조선 중기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이 서포 김만중 선생의 증조 할아버지이며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청과 싸우다 순절을 한 충신입니다.

 

 김익겸 선생이 순절한 해가 인조 14년인 1636년으로

그때 나이가 겨우 23세로 그 당시 서포 선생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지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을 하자

강화도로 가서 계속 항전을 하다가 분신 자결을 한 그분의 순수한 나라 사랑의 충절을 생각하니

요즘같은 실망스런 시대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집니다.

 

김익겸의 아버지인 김반 선생이 아들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 장사를 치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인 김익겸 선생의 묘가 아버지인 김반 선생의 묘보다 위쪽에 자리하고 있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이상해서 묘비의 글을 유심하게 보았는데 정말 아들 묘가 위쪽에 있는 것을 보고

어쩌면 먼저 세상을 뜬 아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나라를 위해 순절한 큰 뜻을 생각하고

 자신보다 위쪽에 묘 자리를 잡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묘를 등지고 바라보니 건너편에 한의학연구원도 보이고

그 너머로 화봉산에서 전민동으로 이어지는 능선길도 보입니다.

 

묘를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가니 서포 선생의 문학비가 있더군요.

서포 선생의 어머니가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고 유복자인 아들만을 의지하여 자식을 키웠으니

서포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구운몽이 남해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사모곡이라고 하지요.

 

 서포 김만중 선생은 조선 현종 때 장원 급제하여 숙종 때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조선시대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서포 선생도 멀리 남해 노도로 유배를 떠나

그곳에 머물면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안그래도 5월중에 경남 남해 편백숲을 찾아 갈 생각인데 그때 가게되면

서포 선생의 유배지인 노도를 꼭 가볼 생각이네요.

 

 서포 선생의 흔적들을 찾아보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화암 사거리를 지나자 점심 시간이 되어 마침 양사싯골 간판을 만나게 되어

택지 개발로 입구가 어수선한 흙길을 따라 식당으로 갑니다.

 

 양사싯골은 마치 산속에 깊이 숨어있는 식당으로

과거에는 약닭을 먹으러 가끔 왔던 곳인데 정말 오랜만에 다시 왔습니다.

6천원짜리 보리밥을 큰 양푼에 쓱싹 비벼서 맛나게 먹었네요.

 

 보리밥을 맛나게 먹고 다시 기계연구원 옆으로 길을 이어걷습니다.

오늘은 산길보다는 포장 길을 많이 걸어서인지 발이 무겁네요.

 

 그나저나 오늘 걸었던 동네길은 그냥 길이 아닌 지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보고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아는 귀한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역사적인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포 김만중 선생도 그 목록에 올려보네요.

정약용, 김시습, 정봉준, 그리고 김만중...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 올레길을 걷고나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길을 걸으며 느끼는 행복이 꼭 멀리가서 만나는

웅장하고 화려한 풍경에만 있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일상의 소박한 기쁨이 모여서 큰 행복이 되고

또 그 소박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의 가벼움이 우선이 되어야 하겠지요.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 의미 있는 동네 길을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