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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사찰

부여 만수산 무량사 매월당 길 - 김시습의 마지막 거처를 찾아서

by 마음풍경 2011. 7. 25.

 

부여 만수산 무량사 매월당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 주차장 ~ 일주문 ~ 도솔암 ~ 태조암 ~ 무량사 경내

~ 무진암 ~ 무량사 주차장(약 5km)

 

 

지난 주는 멀리 순천 송광사에 다녀왔는데 

이번 주는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량사로 발걸음을 합니다.

오래전 부터 만수산 무량사라는 

절이 충남에 있다는 말을 듣고

늘 가봐야지 생각만 했는데 

드디어 오늘 무량사를 찾게 되네요.

무량사(無量寺)는 9세기인 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고찰로

부여군과 보령시 미산면 사이에 솟아있는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찰입니다.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무량사에서

제일 먼저 만나 보는 것은 일주문입니다.

 

조금은 투박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일주문에서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고 

새겨진 편액의 글씨는

전국 여러 사찰 편액에 글씨를 남긴 

차우(此愚) 김찬균이 썼다고 합니다.

 

편액 오른편 위쪽에 남겨진 조그만 

한반도 지형의 두인(頭印)이 독특하지요.

 

또한 일주문 기둥은 옹이를 다듬지 않고 투박하게

사용한 모습이 왠지 더욱 정감있게 다가오네요.

 

무량사 경내로 바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변에 있는 암자들을 먼저 찾아가 봅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것 같은 날이지만

그래서 인지 덥지도 않고 한거롭게 걷기에는 딱입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 옆에 무

량사 구지라고 옛터가 남아 있습니다.

 

무량사는 신라 때 창건한 이후 고려 고종 때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고

현재 무량사는 조선 인조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된 절이라고 하네요.

 

그나저나 20여년전 대전에 처음 내려온 후에 

부여에 만수산이라는 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터 왠지 마음이 끌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리 먼곳도 아닌데 

이곳을 찾게되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서부여에서 고속도로를 빠져야 하는데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서천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네요.

정말 길고 오랜 시간동안 돌고 돌아서

이곳을 힘들게 찾게되니 더욱 감회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론 조선 태종이된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에 나오는

개성에 있는 송악산의 다른 이름인 그 만수산은 아닙니다.

비록 한자가 똑같은 이름이지만요.

 

포근한 숲길을 따라 태조암으로 가기전에

오른편에 있는 도솔암에 잠시 들러봅니다.

 

지난 주부터 암자 길을 자주 걷는데

아마도 암자로 가는 길은 늘 한적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기에 그리 마음이 가나 봅니다.

 

도솔암에 도착했습니다.

다만 그 이름처럼 그렇게 멋진 암자는 아니고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더군요.

 

그래도 앞 마당에 나리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습니다.

 

또한 화사한 꽃과 함께 아주 크고 멋진 

검은 나비도 함께 만나보았네요.

 

도솔암을 되돌아 나와서 숲길을 따라 

태조암 방향으로 이어 걷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재미난 모습의 나무가 있더군요.

처음에는 같은 나무의 가지들이 

얽혀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보니 다른 나무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는데

제가 그리 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모습이 조금 거시기 합니다.. ㅎㅎ

연리목은 아니지만 찐하게 사랑하고 있는 

사랑나무라 할 수는 있겠네요.

 

비록 포장된 길이긴 하지만 주변에

시원한 나무 그늘을 따라 

한적하게 걷는 참 좋은 길입니다.

 

가끔씩은 이정표가 있는 정해진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은 때론 과정은 없이 

목적지만이 남는 경우가 있지요.

때론 목적의 길이 아닌 

과정의 길이 더 아름답기에 말입니다.

 

숲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음으로 

길을 걷다보니 태조암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걷기의 반환점이고요.

 

태조암은 암자라기 보다는 숲속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고택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태조암 앞 마당에서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합니다.

이런 한옥 한채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태조암을 등지고 무량사 방향으로 길을 걷습니다.

 

태조암에서 만수산 정상인 

문수봉으로 오를 수도 있으나

오늘은 그저 휴식처럼 가볍게 걷고 싶네요.

 

 이제 다리를 건너 무량사로 들어가야지요.

 

입구에서 무량사 당간지주를 먼저 만납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앞서 만난

일주문 기둥처럼 꾸밈없이 소박한 모습이지요.

당간지주는 다른 불교 수용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삼한 시대 소도(蘇塗) 신앙이

불교의 토착화 과정 중 수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간지주 옆으로는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이 나옵니다.

 

천왕문 입구에서 바라본 무량사 경내의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오네요.

 

무량사 경내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어서인지

모두가 보물인 석등부터 석탑 그리고 

극락전이 한눈에 바라보이네요.

 

이곳 극락전을 보니 지난 5월에 가본 3층 구조의

국보 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이 생각이 납니다.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741)

 

극락전 바로 앞에 있는 석탑은 보물 제185호로

고려 초기의 것이지만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백제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앞의 석등은 상대석과 하대석에 

적당히 부푼 연꽃 위로 팔각 화사석을 갖춘

전형적인 고려 초기의 양식으로 

보물 제233호라고 합니다.

왠지 단정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석탑과 석등이 서로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그리고 극락전 우측에 자리 잡은 명부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눈길이 교차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중앙 불단 위 지장보살 옆으로

사바 세계를 떠난 사람들이 물끄러미 

명부전 밖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네요.

 

이제 무량사의 하일라이트인 극락전을 찾아야지요.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 극락전은 

법주사 대웅보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국내에 몇 안 되는 복층 불전으로 

내부는 상하층 구분 없는 통층 구조입니다.

 

극락전 내부에는 보물 1565호인 5.4m의 

큰 규모의 아미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양쪽에 각각 4.8m 높이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극락전을 구경하고 나서 이곳 무량사를

찾게된 가장 큰 이유인 김시습 영정을 보러 갑니다.

멋진 모습의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네요.

 

그 옆으로 아주 멋진 색으로 

피어있는 수국이 있습니다.

수국은 꽃말이 성남과 

변덕스러움이라고 하네요.

수국은 환경에 따라 토양이 

중성이면 흰색, 산성이면 청색,

알카리성이면 분홍색으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고 하고요.

 

소박한 규모의 이곳이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있는 곳입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대표적인 

전기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쓴 소설가이자

다섯살 때 대학과 중용을 깨우친 타고난 천재이며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요.

또한 죽을 때까지 불편부당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과 원칙을 고수한 구도자이고요.

 

금오신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

리워하다 죽게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와

염라국과 용궁을 배경으로 한 사회 비판이자 

현실에서 이루지못한 꿈을 그린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등 5편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우기만 했던 제목들이었지요. ㅎㅎ

 

3년전에 죽은 혼령을 모르고 

사랑한 양생이라는 남자,

사랑한 여자와 결혼했으나 홍건적 난으로

죽은 부인의 혼령을 

다시 사랑한 이생이라는 남자,

그리고 천상계의 선녀를 사랑했던 

흥생이라는 남자가 나오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던 작품들입니다.

특히주인공 모두가 능력은 갖추었지만 

부당한 사회현실에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마치 김시습 자신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시습 초상화를 보고 왠지 느낌이 좋아 

삼성각쪽으로 발걸음을 합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삼성각 입구 옆으로

아주 작지만 멋진 계곡이 숨어있네요.

 

물 흐르는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물소리를 오래 오래 들어봅니다.

 

층층이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단음이 아니라 다음으로 화음을 이루네요.

좋네요. 참 좋습니다.

김시습 초상화를 보고 바로 뒤돌아 가려 했는데 

이런 멋진 곳이 있었기에

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끌게 했나봅니다.

 

계곡에 참 오래동안 있다가 다시 

극락전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무량사의 3개 보물들이 한줄로 서있네요.

 

이제 무량사 사찰을 빠져나가야할 시간이 되었네요.

큰 나무 그늘에서 한번 더 무량사를 바라봅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깊은 고요가 있는 사찰입니다.

 

이제 계곡을 따라 무량사를 나섭니다.

 

나가면서 보니 일주문의 이름이 광명문이었네요.

 

이곳 편액도 역시 오른편 위로 

한반도 모양의 두인이 남겨져 있고요.

 

무량사를 나와 주차장 입구 근처에 있는 무진암으로 걷습니다.

 

가는 길 도중에 김시습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폭풍우가 나무가 

쓰러지면서 부도도 함께 넘어졌는데

그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번에 부여에 가면 꼭 찾아봐야겠네요.

 

김시습 부도를 만나고 조금 더 길을 걸으니

오늘 암자길의 종착점인 무진암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앞서 봤던 도솔암이나 태조암과는 다르게

호젓한 암자라기 보다는 일반 사찰 분위기이지만

 

오늘 찾아본 무량사는 어쩌면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가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치게 된 이유가 무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잘알려지지 않은 부여땅 만수산 무량사일까를..

 

어쩌면 태조 이방원이 만수산 드렁 칡을 

이야기하면서 회유했지만

정몽주는 결국은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 하였듯이

김시습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며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생육신이 되었기에

혹여 그 사건을 생각하며 이미 세조도

죽은 이후이기에 역설적인 마음으로

개성의 만수산은 아니지만 한자도 같은

이곳을 찾게 된것은 아닌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잘알려지지 않은 만수산 무량사가 은둔자였던

매월당이 마지막으로 머물기에 좋은 곳이었겠지요.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일평생을 외롭게 아웃사이더로 살다간 그분의 모습을 생각하니

매월당이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달라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늙어서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그 꿈은 과연 무었이었을까요.

 

그래도 처마 끝에 달린 풍경 너머 아늑한 모습이 참 좋네요.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년 뒤에 알아주리

 

- 김시습의 나의 삶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