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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사찰

강진 다산초당 뿌리 길 - 다산 실학의 산실를 찾아

by 마음풍경 2012. 9. 19.

강진 다산초당 뿌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69

 

 다산기념관(수련원) 주차장 ~ 귤동마을 ~ 다산초당 ~ 다산 기념관 주차장

(약 2.6km, 1시간 10분 소요)

 

 

전남 강진군에 있는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의 유배기간중에서

11년을 머물며 후진 양성과 더불어 목민심서의 집필 등 다산 실학을 집대성한 곳입니다.

다산 기념관 주차장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숲길은 가벼운 발걸음과 깨끗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나무 뿌리가 이리저리 드러나 있는 길의 모습을 보고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특히 올해가 다산 선생 탄생 250주년이자 한국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인물로 선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다산초당 뿌리 길을 걷는다면 더욱 뜻깊은 발걸음이 될것 같습니다.

 

 

2010년 2월에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걷기위해 

다산기념관을 찾고 약 2년 반만에 다시 이곳을 찾습니다.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521)

 

입구에 참 좋은 글귀가 있어서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봅니다.

우리가 늘 바라는 기쁨이나 행복이란 것도 바로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겠지요.

 

제가 오늘 걷는 이 아름다운 길에도 행복과 기쁨은 늘상 깃들어 있지만

그것을 진정한 행복으로 느끼는 것은 온전히 내 마음에 달린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나저나 요즘 제 마음속 주제가 '일상의 행복'인가 보네요.

 

참 반가운 시그널을 만났습니다.

저도 작년에 삼남대로 길 중 일부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었는데

벌써 이 리본을 나무에 거는 방법도 다 잊어버렸네요. ㅎㅎ

(삼남길 개척단 11기 활동 - 배꽃길 만들기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814)

 

이곳에 오면 꼭 걸어보하야 할 길이 이 두충나무 숲길입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이 나무들도 키가 더 커진것 같네요.

 

걷기 열풍때문인지 이길도 다양한 이름으로 만들어져서 불리는 것 같네요.

정약용 유배길도 당연히 삼남대로 길중 일부입니다.

 

다산 기념관에서 귤동 마을로 넘어가는 길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다만 이렇게 깊게 땅을 파서 길을 만든 이유가 무언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늘 궁금하네요.

 

비가 많이 오고 땅이 많이 패여서 인지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 위태롭게 보이는데요.

여튼 오늘 걷는 길이 뿌리 길이라는 주제를 입구에서 부터 각인을 시킵니다.

 

식당과 민박집이 있는 율동 마을 입구를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다산초당 길을 오릅니다. 

땅으로 드러나 있는 뿌리들이 마치 계단 역할을 해주네요.

 

몇년전에 왔을 때 보다 숲도 더욱 무성해진 느낌입니다.

최근에 태풍때문에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있는데 이곳은 숨어있는 지형인지라 피해가 없는것 같네요.

 

땅으로 이리저리 얽혀있는 뿌리의 모습에서 이 길을 따라 걸었던 옛 사람에서 부터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했습니다.

아래 시를 읽어보니 다산 선생은 모든 길의 뿌리였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어쩌면 슬픔이 가득 배여있는 뿌리를 밟고 지나가기가 왠지 쉽지않네요.

 

마치 뿌리의 길이라는 이름을 상징하는 듯 고목이 뿌리를 들어내고 휘어져 있습니다.

 

죽어버린 고목의 모습을 바라보니 어쩌면 이루고자하는 큰 꿈을 전부 펴지못한 다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계곡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듣다보니 다산초당이 지척입니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한 곳이라고 합니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고요.

 

다산초당은 아래 그림처럼 초가지붕이었다고 합니다.

1957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을 했고요.

 

과거에는 없었는데 이곳을 관리하며 다산초당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다산 초당의 이야기를 설명해주시는 문화해설사 분들도 계시더군요.

 

다산초당 건물 뒤로 올라가면 정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이 글씨는 다산 선생이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직접 새겼다고 하는데

깔끔하고 정결한 그분의 성품을 보는 듯 하네요.

 

동백꽃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계절에 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었지만 한번도 그 때를 맞춰서 오지는 못했습니다.

다음번에는 백련사 길을 넘어 꼭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에 오고 싶네요.

 

다산초당 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또 연못 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연지석가산이라 이름한 작은 산이 있습니다.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쌓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가 살던 고향인 두물머리가 생각이 나서는 아닐까 추측해보네요.

 

연못을 지나니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이 나옵니다.

이곳 동암은 다산 선생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또한 목민관이 지녀야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하고요.

 

동암을 지나가면 백련사로 넘어가는 숲길이 나옵니다.

언제 걸어도 참 좋은 사색의 길이지요.

 

오늘은 백련사로 가지않고 다산초당만 보기로 하고 숲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천일각이 있던 자리가 전체 수리중이라 그런지 횡하더군요.

 

다산 선생은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천주교 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

그리고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형인 정약전을 그리며 암울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이 생각을 하니 얼마전에 읽어본 김훈 작가가 쓴 '흑산'이라는 책이 생각이 납니다.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의 박해와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를 다룬 소설이지요.

 

그래도 세상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이곳에서 목민심서 저술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사회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산 실학사상을 완성했으니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리고 귀향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일체의 관직에는 오르지 않고 75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실학 연구에만 몰두한 그분의 발자취가 다시금 느껴집니다.

안그래도 올해가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있는 해인데 개인이나 이해집단의 권력욕보다는

국민과 국가 그리고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정성 있는 선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 갑니다.

가끔은 인생도 길처럼 되돌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길이 아니기에 되돌아 갈 수는 없겠지만

다만 앞선 분이 남겨놓은 길과 뜻을 따라 작은 걸음이라도 할 수는 있겠지요.

 

흘러간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겠지만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다산 선생은 유배를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그 분의 꿈이 단지 책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속에 이루어져서 지금 제가 사는 세상도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산초당 길을 걷고나서 다산 기념관을 빠져나오려는데

몇년전 유배길 걷기를 시작한 안내판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배길 구간이 일부 변경이 되고 새롭게 추가가 되어

1코스로 과거에 없었던 주작산 휴양림길이 생겼고 바다둘레길이라고 해서 2개 구간이 추가가 되었더군요.

 

하지만 당초 4코스였던 월출산 자락 기 충천길은 사라지고 없더군요.

요즘에는 국가나 지자체 등에서 만든 길은 거의 가지 않기에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하필이면 변경 지점이 강진군과 영암군의 경계인지라

행여 강진군과 영암군의 이해 관계에 따라 그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늘 사람이 문제지 길이 문제는 아닐테니까요.

다산의 실학 사상도 서로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윈-윈하는 공생을 원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