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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길 이야기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31)] 가을비 내리는 단풍길

by 마음풍경 2013. 11. 3.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31번째

[가을비 내리는 단풍길]

 

 

신성동 ~ 연구단지운동장 ~ 항우연 입구 ~ 생명연 ~ KAIST 동문 ~ 화폐박물관  ~ 자원연 ~ 운동장 ~ 신성동

(약 6.5km, 1시간 40분 소요)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색색으로 피어있는 가을 풍경을 따라

연구단지 운동장 및 주변 연구소 그리고 탄동천을 이어 걷는 단풍길입니다. 

 

 

 이번주는 오랜만에 멀리 가지않고 집에서 빈둥 빈둥 쉬는 시간입니다.

물론 쉰다고 걷기를 멈출 수는 없기에 단풍으로 붉게 물든 동네 주변길을 걷기로 합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오니 단풍의 색감이 더욱 진해지는 것 같네요.

 

한화연구소 담장에는 여전히 계절을 잊어버린 장미가 예쁘게 비를 맞으며 피어있는데

주변이 온통 단풍색이라 그런지 오늘은 장미꽃도 붉은 단풍처럼 보입니다.

 

그나저나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에는 굳이 단풍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사는 곳 주변이 온통 단풍들의 세상이니요.

이 동네에서만 20년 넘게 살았지만 언제나 참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작년 10월말에도 은행나뭇잎 깔린 이 길을 걸었었지요.

([내가 사는 동네 올레길 (22)] 울긋불긋 동네 단풍길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937)

 

비가와서인지 오늘이 그때보다도 더욱 단풍의 색감이 진하고 고운 것 같습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을 밟으며 나무의 향기 가득한 길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주변에 들려오는 새소리도 무척이나 명랑하게 들리고요.

 

어느새 항우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 길 또한 매년 가을이면 아주 고운 색감의 단풍길이 되지요.

 

우주를 향하고 있는 거대한 위성안테나와 고운 색감의 단풍 풍경도

이색적이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긴 자연은 무엇이든 다 품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지요.

그나저나 위성 안테나를 보니 얼마전 보았던 '그래비티'라는 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재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 영화인데

저는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실존'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세상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생명줄은 무엇일까하는 생각도 들고요.

 

길을 걷다가

문득

그대 향기 스칩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꽃도 그대도 없습니다.

혼자

웃습니다.

 

<김용택 - 향기>

 

 

길에는 늘 아스라한 추억이 배여있고 지나버린 향기 또한 느껴집니다.

 

삶이 때론 아리고 저린 이유는 어쩌면 삶속에는 흘러가버린 길들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이라는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KAIST 동문 앞을 지나가는데 비도 거의 그쳐갑니다.

 

노란 은행나무와 푸른 메타쉐콰이어 나무가 참 잘어울리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머지않아 은행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으면 푸른 메타쉐콰이어 나뭇잎도 물들어 가겠지요.

 

이곳 주변에도 비에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큰 빨간 장미를 만납니다.

노란 은행잎이 뒷 배경이 되어주니 장미 색이 더욱 붉게 느껴지네요.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이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심보선 - '나'라는 말>

 

 

화폐박물관 앞의 가로수 길도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그나저나 가을 정취가 가득한 길을 걷다보니 문득 이 시가 생각이 나서 길게 옮겨보았네요.

 

요즘 제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제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늘 부끄럽고 죄만 짓고 산 것 같아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지요.

 

그런 고민과 생각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더군요.

 

"촌스럽게 살자"

 

 

촌스럽다는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웅숭깊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자존심이 세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때로 분노할줄 아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 때문에 가슴아프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쾌활명랑한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 생각을 하기보다 돈을 적게 쓸 연구를 하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고기 먹을 때 밥도 함께 싸먹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아플 때 라면이 생각나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남한테 절대로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도시스러운 것의 반대가 아니라, 도시스러움조차 모두 감싸안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도시스러운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이다.

'어린 도시스러운 것'이 '어른 촌스러운 것'을 맨날 놀리고 울려도

촌스러운 것은 어른스러운 것이라, 그저 조용히 웃으며 간다.

어린 도시스러운 것까지 품에 안고, 쾌활명랑하게, 천진난만하게,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연민하면서, 그렇게 뚜벅뚜벅!

 

 

소설가 공선옥씨의 글인데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울림을 주더군요.

어쩌면 지나온 삶이 돈, 명예, 경쟁, 소비로 점철된 도시스러움을 추구하는 삶이었기에

이제는 제 자신 스스로 비우고, 버리고, 떠나는 '촌스럽게 사는' 법을 배우며 살고 싶습니다.

 

노란 은행나무 숲길을 걷는데 작년에 다녀온 남이섬이 생각이 나는데

찾아보니 그날이 딱 일년전 오늘이었습니다. ㅎ

(남이섬 낭만 길(1) - 만추의 정취와 낭만이 가득한 곳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939)

 

가을 햇살에 비치는 풍경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새벽 안개 피어오르는 풍경 또한 너무나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추억으로 남은 곳이었네요.

(남이섬 낭만 길(2) - 환상적인 새벽 물안개를 만나다.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940)

 

물론 오늘 가볍게 걷는 동네 길도 남이섬의 운치 못지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또한 사람들로 분주한 남이섬과는 다르게 비어있는 벤치가 쓸쓸할 만큼

오늘 걷는 길에는 한적함과 평화로움이 있습니다.

 

가을은 왠지 누군가와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있는 것이 더 편합니다.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저 또한 붉게 물들어버리는 일이 더욱 좋아서인가보네요.

 

연구단지 운동장에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가을의 정취는 가득합니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라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가을비에 젖은 단풍들이 더욱 진한 얼굴로 다가오는 풍성함도 있었습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삶의 이치이겠지요.

잠시동안이었지만 형형색색 단풍의 세상에 머물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